금문을 이해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세 가지
‘상고금문’에 의해 삼황오제시대가 역사시대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그 내용을 이해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기존의 역사관에 대해 어떤 의심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더 더욱 황당무계하게 들릴 것이다.
‘상고금문’을 조금이라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책장을 넘기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는 삼황오제시대의 가족제도이다.
당시의 가족제도를 모르고는 이 시대의 정치 상황과 사회제도를 이해할 수 없다.
낙빈기는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모계사회, 특히 삼황오제시대의 특수한 모계사회제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의 단추가 처음부터 잘못 끼워졌다 했다.
이 시대는 모계제(지금의 가족제도로 보면 외가가 실권을 쥔)의 오랜 유습이 정착해 있던 때였고, 모든 권력이 모계에 실려 있던 때여서 부계사회로의 변혁이 많은 저항을 받던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의 모계제도는 아주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서구의 인류학자 엥겔스나 모르간이 말하는, 즉 두 사람의 남편과 두 사람의 부인이 공동 부부가 되어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양급제(兩級制․푸나루아 Punalua) 모계사회였던 것이다.
그런데다 일단 사돈사이가 되면 지금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얽히고설킨 겹사돈 관계(일명 누비혼인)를 형성하고 있어 굉장히 혼란스럽다.
예를 들면 역사의 첫 장을 연 신농은 중국에서 시조로 떠받들고 있는 황제의 고모와 딸을 각각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으로 받아들여 황제 집안의 사위가 된다.
그런데다 황제 또한 신농의 고모와 딸을 각각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으로 맞아들이니 양쪽 집안의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장인과 사위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양급제도는 아버지나 아들간, 또 형제간, 삼촌과 조카 등 두 사람의 남자가 공동의 남편이 되고, 두 사람의 여자가 부인이 되어 한 가정을 꾸리는 제도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되든, 삼촌과 조카가 되든, 형과 그 아우가 되든 공동의 남편끼리는 형(兄)과 제(弟), 즉 형제(兄弟)라 불렀다.
요즘 가족제도로 보면 동서 관계에 해당되고 있어, 지금의 형제 개념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라는 글자를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형님과 아우라는 뜻으로 보면 큰 착오를 일으키게 된다.
당시의 ‘형(兄)’이라는 글자는 ‘어른(長)’이라는 뜻이다.
같이 장가든 남자 둘 중에서 나이가 많은 남자를 일컬었고, 형을 따라간, 즉 데리고 간 작은 남편 데련님이 ‘제(弟)’이다. 곧 ‘형’과 ‘제’는 공동 남편들 간의 서열이었다.
형제의 관계가 비교적 그 범위가 넓었던 반면 부인의 경우는 신농과 황제 집안의 관계에서도 알 수 있듯 반드시 고모와 그 조카가 한 쌍이 되어야만 했다.
이때 고모는 모일급처속(母一級妻屬), 즉 첫째 부인인 모일급부인이 되고, 조카는 자일급첩속(子一級妾屬) 즉 둘째 부인인 자일급부인이 된다.
제위를 받게 되면 모일급부인이 정비(正妃)가 되고, 자일급부인은 차비(次妃)가 된다.
모일급부인의 자손은 어머니 계열의 성과 아버지 계열의 씨(氏) 등 성씨를 사용할 수 있지만 자일급차비의 자손은 철저히 자(子)자 계열의 성씨(巳․己․巳․匕․比․摯)만을 쓸 수 있었다.
또 모일급부인이 낳은 아들이 다음의 왕권을 잇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후대로 가면 자일급차비의 아들에게 왕권을 넘기는 일도 일어나 왕위를 둘러싼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경우도 생겨나게 된다.
상고금문에서 사위는 ‘아들 자(子)’로 쓰였다. 지금 사전의 풀이와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당시 모계풍습에 따라 남자가 처갓집으로 장가들던 특수한 시대 상황에서 생겨난 글자로 다음 대를 잇는 사위아들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그러나 역사를 기록하는 후세 사가들이 ‘자(子)’를 아들로 해석함으로써 중국인의 시조 황제와 동이족의 신농이 형제가 되어버리는 등 친가와 외가를 구별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자기가 낳은 아들은 ‘남자 남(男)’으로 썼다. 동시에 형님이 장가든 처갓집, 즉 형수가 되는 사람의 여자 형제에게 장가드는 남자를 뜻하기도 했다.
또 친삼촌을 가리키는 숙부(叔父)의 ‘숙(叔)’은 외삼촌을 가리키는 글자이며, ‘백(伯)’자 또한 처가의 외삼촌을 가리키는 글자였다. 주의하지 않으면 자칫 헷갈리기 쉬운 부분이다.
둘째는 금문은 하나의 글자에 최소 두 개의 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글자는 한 자지만 음은 여러 가지로 읽힌다는 뜻이다.
본음(本音)이 있으면 변음(變音)이 있고, 또 방음(方音)이 있고 그것이 또 변해 재변음(再變音)이 생겨나는 등 아주 다양하다.
이는 국가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왕실의 실권자가 바뀔 때마다 표현하는 말과 문자가 달라지는데다 여러 종족과 섞이기 때문이다.
세계가 한 지붕이라는 지금도 중국에 가보면 같은 글자이지만 그 표현은 표준말을 쓰는 북경과 타지방이 전혀 다르다.
북경 지방의 말이 호남 지방에 가면 전혀 통하지 않고 호남 지방의 말이 운남 지방에 가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일자(一字) 수십음(數十音)으로 변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삼황오제시대부터 찾아 볼 수 있다.
삼황오제시대에는 동이족인 신농계와 한족인 황제계가 번갈아 집권을 했다.
당시에는 신농계가 쓰고 있는 발음이 원칙적으로 본음이었고, 황제계의 언어가 변음이었다.
그러나 삼황오제시대가 지나고 황제계가 세운 하나라가 수백 년간 집권한 이후에는 황제계의 변음이 모두 본음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예를 들면 신농 계열에서 사용하던 사람 ‘인(人)’의 본음인 ‘인․님․임’이 황제계에서는‘이(夷)․시(尸)’로 새김 되었다.
‘큰사람 인(人)’의 뜻이었던 ‘이(夷)’는 2000년 뒤 주(周)나라 공자(孔子․기원전 551~479) 때에 오면 신농계를 비하하는 글자로 변해 오랑캐 ‘이(夷)’로 그 뜻이 변하고 만다.
‘이(夷)’는 원래 하나라가 시조로 떠받들고 있는 우임금의 이름이었고, 주나라 여러 왕의 이름에서 ‘이(夷)’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도 ‘인(人)’자의 변화를 알지 못한 중국인 스스로가 제 조상을 오랑캐로 부르는 우를 범하고 만 것이다.
셋째는 ‘상고금문’을 통해 밝혀진 계보도를 대략적으로라고 외어 두면 이해하기가 쉽다.
상고금문 자체가 제1대 임금 신농에서부터 제9대 백익(伯益․기원전 2303~2298)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이름 글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일단 계보도와 이름 글자의 모양을 짚고 넘어가는 게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